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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 가츠키요의 다문화이야기(한일)

아시아에 있어서의 두 개의 근대화 추천하기
작성자MUTO KATSUKIYO 조회수1,520건 추천수3건 작성일자2015-07-31
 
◈‘사랑’과 ‘이성’의 보편성을 찾아
 
세계의 평화를 바라고 인간의 행복을 생각할 때, 한국사람은 보편적인 인간성의 중심이 ‘사랑’이라 하면서 인간의 정을 절대시 한다. 흔히 “한국사람은 정이 많다”고 하는데 이 ‘정’이란 말도 영어로 번역하면 역시 ‘LOVE(사랑)’가 된다. 반면 일본사람은 인간성의 보편적 중심은 ‘이성’이라 생각하면서 규칙을 지키는 성실함을 절대시 한다.
 
한국사람이 ‘사랑’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은 한국의 근대화 정신의 중심이 〈기독교 인도주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요, 일본사람이 ‘이성’을 말하는 것은, 일본의 근대화 정신의 중심이 〈근대 합리주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근대화’는 중세 유럽에서 일어난 두 개의 혁명,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문예부흥)’에서 시작된다.
 
당시의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절대 초월적인 세계관이 인간 본래의 본성을 억압하게 되었을 때, 거기서부터 인간 자신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그것을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를 만들려는 두 가지의 개혁이 일어났다.
 
거기서 ‘종교개혁’이 목표로 한 것은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찾은 보편성이다. 즉, 하나님은 만민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있으며, 인간은, 모든 제도나 틀로부터 해방되어, 서로 그 보편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으로써 본심의 자유와 평화,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었다.
 
1648년, 30년에 걸친 개신교와 천주교의 종교전쟁이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종결되는 동시에 ‘국제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류 의식이 생겨나 이른바 인류 한가족주의, 박애주의, 민족자결주의의 〈기독교 인도주의(humanitarianism)〉가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한편, ‘르네상스’이후의 계몽사상이 목표로 한 것은, 말하자면 땅으로부터 찾아낸 보편성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의심되지만 의심하고 있는 그 자체인 ‘이성’만은 믿을 수 있다 한 것처럼, 종교 자체가 인간을 무지에 빠뜨리고 인간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한 계몽 사상가들은 오로지 ‘이성’만을 절대시 하는 〈근대 합리주의(rationalism)〉를 주창했다.
 
‘이성(reason)’이란, ‘1+1’이 나에게 있어서도 ‘2’이며, 이웃집 아저씨에게 있어서도 ‘2’,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원주민에게 있어서도 ‘2’이듯이, 인간 자신 안에 수학이나 자연법칙과 같은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다. 거기서부터, “인간이 바르게 이성적이기만 하면, 세계를 범죄 없는 평화세계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이상이 나오고, 실정법주의에 의한 법률 중심의 정신이나 소위 말하는 과학만능주의가 태어났다.
 

◈‘명치유신’에 의한 ‘반쪽 근대화’
 
한일 양국은 그 대조적인 근대화의 과정에 있어서 이 두 개의 근대화 정신을 각각 나누어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도 반도국가와 섬나라라는 양국의 지리적 요인이 깊이 관련 되어 있다.
 
한국은 반도국가라는 요건으로, 인도의 불교나 중국의 유교라는 아시아의 대륙문명과 직접적 관계를 갖고 그 중심적인 정신을 집약시켜 그 어디보다 엄밀한 정신문명을 쌓아 왔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근대화라는 서양 문명의 유입에 대해서는 그것을 조선 문명 가운데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많은 갈등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대륙과의 관계가 바다에 의해 단절 된 섬나라로서 오랫동안 아시아 문명의 외각에 위치해 왔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그 문명들의 중심 정신을 엄밀하게 정착시키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 대신 자유로운 입장에서 다양한 문물을 반입해서 합리적으로 디자인하고 융합시킨다는 합리주의가 자라났다.
 
불교나 유교도 일본에서는 중심적인 사상보다 어떠한 숭상할 ‘물건’이나 경전, 의식, 양식 등을 갖고 오는 것을 통해 즉물적, 합리적으로 자유분방하게 전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일본 시골에 가면 집안에 있는 제단에 불상, 십자가, 마리아상, 신도의 신, 조상들의 신주 등을 함께 모시고 있는 집도 흔히 볼 수가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일본의 스님은 결혼도 하고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룸살롱도 가고 삭발조차 안하는 스님도 있다. 그러한 스님이 오히려 일본에서는 안심감이 있고 선호되고 인기도 많고 신자도 많다. 
 
그러한, 일본의 지리적 요건으로부터 나온 사상적 자유로움과 합리주의가 근세에 있어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신속한 ‘명치유신’이라는 〈근대 합리주의〉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에 결실된 것이다. 
 
이미 그 이전의 에도시대에도 쇄국 정책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서구 국가와의 통상을 계속해 온 일본은 기독교의 유입은 철저히 거절했지만 많은 서양 학문이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오사카에서 쌀의 변동 환율제를 실행하는 정도까지 자본주의의 시스템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 결과가 어느 곳 보다 재빠른 개국과 ‘명치유신’이라는, 말하자면 아시아에 있어서의 ‘르네상스’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인도주의〉이라는 정신문명의 수용이 결여된 〈근대 합리주의〉만으로 인한 ‘반쪽 근대화’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잔기리아타마’와 ‘頭可斷 髮不斷’
 
결과적으로 일본은 당시의 제국주의 사회의 일원이 되고 곧바로 부국강병의 힘의 논리를 국시로 내세우면서 자기 멋대로 ‘야만’이라고 업신여긴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제국을 식민지화해 간 것이다.
 
그러나 한일병합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일본제국’의 〈근대 합리주의〉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 정책은, 자신의 종교적 사상적 전통을 무시한 힘에 의한 지배에 지나지 않았다.
 
예컨대 ‘단발령’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신분제도를 벗어나는 머리 스타일의 자유화였고 “잔기리아타마(깎은 머리)를 두드려 보면 문명개화의 소리가 난다”라고 밝게 받아들여진 반면, 한국에서는 친일정권에 의해 관리가 길 가는 사람의 머리를 무조건 깎는 강제로서 행해졌다.
 
당시의 한국백성들은 앞에서도 말한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고 한 〈효경〉의 첫 구절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함부로 손상시키면 안 된다는 ‘효’의 정신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을 싫어했다. 성인 남자의 표징으로서의 ‘상투’를 깎으라고 할 때, 많은 유생들이 ‘頭可斷 髮不斷(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갔다.
 
그러한 억압 가운데서, 한국사람의 진정한 근대화 정신이 된 것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강력히 진행시켜 온 종교인, 특히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사랑과 자유의 정신이었다.
 
1918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받고 1919년, 202만의 국민들이 ‘만세’를 부르짖으며 일제의 총탄 앞에 생명을 내던져 갔다.
 
‘사랑’에 의한 비폭력의 정신을 가지고, 오로지 자국의 독립에 대한 ‘믿음’을 외치면서, 잔인한 폭력 앞에서도 돌 하나 안 던졌던 이 ‘만세운동’이야말로, 역사에 유례없는 인간 정신의 최고의 존엄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그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시의 일본사람들은 총을 겨누면서 그 위협에 떨었다고 한다.
 
그 정신은 직후의 중국의 5.4 운동이나 터키의 조국 해방운동에 영향을 주며, 같은 해에 일어난 이집트 혁명이나 간디의 제1차 사티야그라하 운동 등, 아시아나 중동 지역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한국의 독립 운동의 결실로서 1945년에 맞이한 ‘광복’이야말로, 말하자면 〈기독교 인도주의〉을 중심으로 삼아 보편적인 ‘사랑’에 의한 인간 정신의 자유를 쟁취한, 아시아에 있어서의 ‘종교개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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